물량의 시대를 넘어 실존의 시대로: 『중국천하시대 한국 산업의 길, 트랜스패런시』
과거 한국 경제를 견인했던 조선, 자동차, 스마트폰 등 주력 제조업이 거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단기적 이익과 외형적 성장에 몰두하며 선두를 쫓던 ‘빠른 추격자’ 모델은 수명을 다했다. 이 책은 유례없는 산업 굴기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며(0 to N) 글로벌 패권을 장악해 가는 ‘중국천하시대’를 냉철하게 진단하며, 한국 산업이 쥐어야 할 새로운 100년의 생존 무기로 ‘투명성(Transparency)’을 제시한다.
저자는 투명성을 단순한 윤리적 잣대가 아닌 글로벌 패권의 가장 강력한 무역 장벽이자 생존의 전제조건으로 재정의한다.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디지털 제품 여권(DPP), 공급망 실사 지침(CSDDD) 등 유럽연합(EU)이 주도하는 ‘규범 권력’은 기업의 생산 전 주기를 투명한 데이터로 증명할 것을 강제하는 거대한 ‘외적 투명성’의 압박이다.
그러나 이 책의 진정한 통찰은 외부의 규제를 넘어서는 ‘내적 투명성’의 철학적 규명에 있다. 저자는 키에르케고르의 ‘단독자(The Individual)’ 개념을 빌려, 타인의 시선이나 자본의 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내면의 양심과 진실 앞에 정직하게 서는 주체적 개인과 기업만이 ‘실존 산업’을 잉태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단기적 차익과 외형 부풀리기에 매몰된 ‘껍데기 산업’은 외부 충격에 쉽게 무너지지만, 기술적 진실에 헌신하는 실존 산업은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책의 2부와 3부에서 펼쳐지는 글로벌 거대 기술 기업들의 사례는 투명성이 어떻게 압도적 산업 지배력으로 치환되는지를 생생히 보여준다. ASML은 물리 법칙 앞에서의 ‘지적 정직성’과 경영 위기를 협력사와 숨김없이 공유하는 ‘위험의 민주화’를 통해 거대한 오픈 생태계를 지휘한다. TSMC는 아시아적 관시(인맥) 관행을 버리고 정량적 데이터와 원칙만을 신봉하는 ‘투명성의 시스템화’로 글로벌 팹리스 고객들을 완벽히 종속(Lock-in)시켰으며, 엔비디아 역시 실패를 징벌하지 않고 집단 지성의 자산으로 전환하는 개방형 혁신 생태계로 글로벌 표준을 장악했다.
이어지는 북유럽과 에스토니아의 벤치마킹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놓인 한국에 강력한 시사점을 던진다. 덴마크가 1864년 영토 상실의 뼈아픈 트라우마를 ‘자기 발견의 철학’으로 승화시키고, 기술의 무료 공유(오픈소스)와 협동조합 모델을 통해 세계 최고의 풍력 산업(베스타스)을 일궈낸 역사는 경이롭다. 에스토니아가 국경 없는 디지털 플랫폼(엑스로드)과 투명성을 통해 국가 안보와 ‘초크포인트’를 확보한 궤적 역시, 국가의 생존이 물리적 영토가 아닌 투명한 시스템에 있음을 입증한다.
저자는 한국 산업의 위기를 진단함과 동시에 우리 내면에 잠든 투명성의 DNA를 호명한다. 주류의 비관론 속에서도 절대 고독을 견디며 HBM 시대를 연 KAIST 김정호 교수의 선구적 연구, 단기 주가 부양의 압박을 차단하고 렉라자 신약을 일궈낸 유한양행의 재단 소유 지배구조 등은 한국 산업이 품고 있는 실존적 저력의 증거다.
이 책은 단순한 경제 경영서를 넘어, 글로벌 가치사슬의 격변기를 통과하는 대한민국 산업계에 건네는 묵직한 철학적 처방전이다. 물량과 통제 위주의 팽창에 맞서 ‘보이지 않는 자본’인 투명성을 어떻게 무기화할 것인가 고뇌하는 리더와 정책 입안자들에게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