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훈, 이양하, 피천득의 수필이 있었고 민태원, 김태길, 이어령의 수필이 있었다. 지금은 김영민, 김수현, 전경철의 수필이 있다. 앞의 어른들 수필이 일제와 해방, 전쟁과 궁핍의 시대에 나온 주옥같은 명문들이라면 현대 수필가들의 글은 다르다. 고독과 사회모순과 인권과 글로벌 현상을 헤집는 건조한 문장들이다. 왕왕 작가 스스로 ‘산문집’이라 이름 붙이는 것을 보아도 그러하다. 피천득의 표현과는 달리 수필은 이젠 청자연적(靑瓷硯滴)이 아니요, 난(蘭)이나 학(鶴)이나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 아닌 것이다. 단어 하나 접속사 하나를 각고면려하던 한국현대문학 초창기 수필들과 달리 오늘의 수필은 엄청난 폭력이 되어 개인을 억누르는 21세기 현대문명 아래 독자 한 명 한 명에게 발부하는 처방전이자 아홉 시 뉴스의 앵커 멘트이자 고단한 자들에게 보내는 아군의 암구호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2015년 에세이스트 작가로 등단한 조성자는 조용히, 그러나 꾸준히 팬덤을 구축한 주목할 현대 수필가다. 그의 글 역시 애써 미문으로 다듬는 일 따위는 없다. 여류작가에게 흔히 붙는 평, “여성 특유의 감수성과 섬세함으로…”가 그에게 붙는다면 듣자마자 토악질을 할 사람이다. 그가 낸 몇 권의 수필집들을 보자면 작가가 의도했건 안 했건 ‘한번 다시 생각해 보는 버릇’의 유쾌한 행진들이 이어진다. 평론가 김종인은 이에 대해 “농담을 거는 대상은 독자이지만 이 작가가 말을 거는 존재는 신이다. 신에게 대들고 화내고 투덜거리고 농담 따먹고 경우에 따라서는 맞먹으려고 한다”고 평한 적 있다. 풍습과 세태라는 이름으로 당연한 듯 행해지는 많은 일들이 알고 보면 얼마나 불필요하고 하찮고 위선적이고 엉터리인가를 가차 없이 내지른다. 청자연적 같은 건 빚을 겨를이 없다.
『땅바닥 에세이』는 저자가 머리말에 밝혔듯 저자 초창기 글들의 모음이다. 80년대 중반부터 일간지 에세이란에 썼던 글들과 이후 작가로 등단하기 전까지 다양한 곳에 발표했던 에세이, 연설문, 번역문들을 엮었다. 저자의 필명처럼 된 ‘땅바닥’ 연작 시리즈의 두 번째 수필집이자 저자의 집필 연대기로 보면 첫 번째 글이다. 저자는 최근 자신의 대표작일 수 있는 『베란다 보이』를 10년 만에 개정판 출간했고 지난해에는 인터넷 카페 회원들의 수다 모음집인 『땅바닥 memo』를 냈다. 후속작들의 원고도 갈무리 단계다. 영상의 시대, 그것도 긴 영상은 외면당하는 숏폼의 시대에 저자가 이끌고 있는 독자층과 그들의 ‘읽기를 포기하지 않는’ 문화현상은 대단하다.
『땅바닥 에세이』를 보며 놀란 것은 저자의 무지막지한 독서력이다. 메인 콘텐츠 사이사이에 양념처럼 끼어 있는 메모들은 저자의 방대하고 종횡무진하는 독서영역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이집트 신들의 지배주기, 천문학의 놀라운 성과, 비주류 역사학의 이설(異說)들, 붓다, 일본 추리작가들, 미중경쟁, 가톨릭, 무속 등등 저자는 호기심 가득 찬 10대 소년처럼 모든 지적 탐험을 즐긴다. 다만 저자는 이 넓은 독서를 콧노래 부르며 즐기는 듯하다. 결코 숭배하거나 빠져들지 않는다. 다 읽으면 휙 던지는 독서다. 저자의 수필이 그 누구의 수필과도 닮지 않은 이유가 여기 있을 듯하다. 여러모로 에너지 넘치는 작가 조성자의 활약과 『땅바닥 에세이』의 개정판 출간은 현대 한국문학에 반가운 일이다.